​주보 성인

SAINT LAURENTIUS
Laurent-Joseph-Marius IMBERT / 성 범세형 라우렌시오

성 라우렌시오 앙베르 주교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ès)로 이사하였고, 그는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공부를 위해 엑스(Aix)로 보내졌을 때 그는 로자리오를 만들어 팔아 학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1818년 10월 8일,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사천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12년 이상을 머무르면서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ère)주교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조선입국을 앞두고 선종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앙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을 횡단한 후, 1837년 12월 16일에 봉황성의 변문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북경으로 가던 사절단에 다섯명의 신자가 있었고, 그 중 조신철 가롤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의 협력을 얻어 12월 17일 밤에 조선신자와 함께 변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의주 관문을 숨어 넘어서 13일 후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조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앞서 입국한 모방(Pièrre MAUBANT)신부, 샤스땅(Jacque CHASTAN)신부와 힘을 앞쳐 선교한 결과 1839년에는 신자가 약 9천명에 달했다. 또한 조선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정하상과 이재의 등 네 사람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었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앙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전교하고 있음도 알려졌다. 앙베르 주교는 배교자 김여상(김순성)의 간계로 발각되었고 화가 신자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 자수했다. 모든 해외 선교사들의 행방을 드러내면 개종한 신자들이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주교는 동료인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에게 자수할 것을 권고했다. 주교는 여러번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시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지만 조선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한강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로 조선에 입국한지 불과 2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길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약 20일이 지나서야 서강대학교 노고산성지에 묻혔다. 그러다가 1843년에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삼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그로토로 이장되었다. 일부 유해는 절두산 순교 성지에도 모셔져 있으며 최초의 매장지였던 삼성산 성지에도 세분의 성인을 모시고 1989년 축성식을 갖고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 의해 성지가 관리되고 있다.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앙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신부는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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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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